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이 한반도를 뒤덮었습니다. 하지만 해방은 동시에 분단의 그림자를 동반했고, 새로운 국가의 방향을 둘러싼 혼란이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이 혼돈의 한복판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여운형입니다. 그는 광복 직후 좌우 진영을 아우르며 조선인의 주체적인 정부 수립을 꿈꾸었고, 그 중심에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 합작의 이상, 건국준비위원회의 창설과 활동, 그리고 그것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조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운형은 누구였나?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그리고 정치가입니다. 3.1운동 이전부터 민족자결권을 주장하며 언론계와 정치계를 넘나든 그는, 광복 직후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 통합 정부 수립을 시도한 인물입니다.
그는 좌우를 넘는 '중도 세력'으로 평가되며, 단순한 이념의 구호가 아닌 현실 가능한 통일국가의 토대를 꿈꿨던 리더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신념 아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합니다.
2. 건국준비위원회: 민족 자치의 첫 시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서울에서 여운형과 조동호 등이 주도하여 창립한 조직입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을 정도로 사실상 전국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치 치안 조직과 민생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 조직 목표: 일제 잔재 청산, 행정 공백 최소화, 민중 자치 실현
- 구성: 좌익 세력 중심이었지만, 초기에는 우익 인사들도 일부 참여
- 조직 규모: 전국 145개 지부 설치, 자위대와 행정조직 운영
건준은 사실상 조선인의 자주적 임시정부를 표방했지만, 외부 세력의 간섭과 내부의 이념 갈등 속에서 곧 균열이 발생합니다.
3. 좌우 합작 운동의 전개
여운형은 조선이 분열되지 않기 위해 좌우 합작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좌익의 박헌영, 우익의 김규식과 협력하며 “하나의 조선”을 위한 통일적 행정 체제를 구상했습니다. 그는 미국 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자주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미국은 여운형을 불신하고 이승만과 같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에게 더 많은 신뢰를 보였습니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 성향의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와 연계하여 행정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이 역시 미군정에 의해 무력화되었습니다.
4. 좌우 합작의 이상과 현실의 충돌
건국준비위원회는 처음에는 전 민족이 힘을 모으는 듯 보였지만, 곧 이념 대립에 휘말립니다. 특히 좌익 계열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우익은 탈퇴했고, “건준은 좌익 조직”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이유 있는 실패
- 미군정의 불신: 미군정은 건준을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의 도구로 간주하여 해체를 명령
- 좌우 이념의 불균형: 실질적으로 좌익 성향이 우세해 우익 세력 이탈
- 국제 정세: 미소 냉전 구도가 한반도에도 투영되면서 민족 내부 합의보다 외세 영향이 더 강력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여운형은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 합작 7원칙’을 내세워 통합 정부 구성을 재시도했으나, 이 역시 남북을 넘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맙니다.
5. 여운형의 암살과 상징적 실패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암살당합니다. 누가 그를 죽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단서는 없지만, 정치적 이유와 배후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여운형의 죽음은 단순한 한 사람의 암살이 아니라, 좌우를 잇는 ‘민족의 가교’가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남북 분단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한반도는 결국 남한과 북한, 두 개의 정부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6. 오늘날 여운형과 건준이 던지는 메시지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는 짧지만 강렬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꿈꾼 좌우 통합의 이상은 현실에서 실패했지만, 민족 자주와 통일이라는 가치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여운형은 이념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한 정치가였으며, 건준은 자주 정부 수립의 실험대였습니다. 분단 8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이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맺음말
여운형은 정치적 계산보다 민중의 목소리와 민족의 통합을 우선시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비극적 죽음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 되었지만, 동시에 민족 자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가 남긴 “우리는 하나의 조선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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